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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도헌학술원
  • 입력 2024.03.12 23:40

윤덕선 박사는 의사와 교육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사회를 보는 식견과 미래에 대한 통찰로도 지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심지어 몇몇은 그에게 정계에 진출해야 한다고 강권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주춧돌을 자임했고 떠들썩하게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생겨난 별명이 ‘숨은 거인’이었다.

거인 하면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는 라틴어 격언을 떠올리곤 한다. 뉴턴이 인용하여 유명해진 이 말은, 나의 성과는 이전 세대가 쌓아올린 토대에 기반했다는 의미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더 큰 포부를 갖자는 격려로도 쓰인다.

이 글의 취지는 우리 학교와 의료원의 주춧돌이 된 거인, 일송의 어깨 위에 서서 오늘을 더 넓게 보자는 것이다. 그의 유산은 세 개의 단어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그의 아호雅號이자 우리 재단의 이름이 된 ‘일송一松’이 하나이고, 그가 고향에 설립했던 첫 병원부터 한림대학교의료원에 속한 모든 병원에 들어 있는 ‘성심聖心’이 또 하나이고, 마지막은 그가 대학을 설립할 때 선택한 ‘한림翰林’이다.

 

일송, 민족을 위한 헌신

일송은 1921년 평안도에서 태어났다. 평안도는 조선시대 내내 비주류 지역이었고 빠르게 신학문, 신사상의 요람이 되었다. 일송 또한 그 활력을 공유했고 명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인 선생은 헌신하지 않는 한국의 민족성을 강하게 질타했다. 식민주의에서 나온 말이긴 했지만, 일송은 그 비판을 듣고 평생의 지향을 정하게 되었다. 그의 좌우명인 ‘주춧돌이 되자’는 다짐이 그것이었다. 다른 한국인 선생은 일송一松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한 그루 소나무처럼 꿋꿋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였다.

일송이 의학을 선택한 데에는 ‘일인에게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려면 그나마 차별이 덜하고 객관적으로 결과가 자명한 학문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 공부를 진행하며 그는 의료를 통해 민족에 도움을 주겠다는 목표를 구체화했다.

한국의 현실에서 의학을 통해 헌신하겠다는 것은 물론 일송만의 운명은 아니었다. 스승이었던 백인제 역시 비슷한 길 위에 있었다. 백인제는 해방 후에 사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그에 비해 일송은 의료 교육과 병원 경영에 일관되게 투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근현대의 의료인이 꿈꾸었던 의료-교육-연구 시스템을 구체화했다. 민족에 헌신한다는 출발은 같았지만 일송은 의료 부문을 꿋꿋하게 지켜내고 마침내 실질적인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성심, 사람을 위한 사랑

성심은 예수의 마음이자 사랑을 의미하며 일송의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이었다. 일송 또한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가졌고 평생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1956년 교육자로 처음 부임한 기관도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였다.

일송 개인의 신앙 행위는 물론 사회에 대한 봉사 역시 쉼이 없었다. 가톨릭 의대를 이끌던 시절에는 서해의 벽도 백령도를 비롯해 곳곳의 무의촌에서 진료했다. 1971년에 독립한 후에는 한강성심병원 한 층을 ‘성심자선병원’으로 운영했고, 신림동 일대의 빈민촌에서 생활 개선 사업을 벌였으며, 나환자와 맹인을 비롯한 장애인들을 지원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빈민촌에 다수의 복지관을 건립하고 운영했다. 영양·보건·위생과 관련한 조사 연구, 예방 사업, 장학사업 등 보건복지 사업도 일일이 손꼽기 힘들 정도였다.

일송의 본업은 물론 병원과 학교의 경영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선배였던 장기려와 달랐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 장기려는 오로지 인술仁術을 실천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일송은 경영과 봉사라는 두 길을 병행했다. 일송과 같은 스타일은 이윤 추구와 사회 복지라는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는 요즘의 ‘사회적 기업’과 흡사하다.

경영과 봉사의 두 끈을 잘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일송이 병원이나 학교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관리하는 자세로 임했기에 가능했다. 그 자세는 아마 인간은 모든 것을 신에게 위임받았다는 신앙에서 나왔을 터이다. 우리 학교의 병원에 모두 ‘성심’이 들어 있는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다.

 

한림, 전인全人과 전문專門의 조화

일송이 1982년에 대학교를 설립할 때 선뜻 ‘한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옛날 최고의 선비를 보통 ‘한림학사翰林學士’라고 불렀다. 선비들의 학문 목적은 지금과 달랐다. 전문專門 즉 한 분야에 빠지는 일을 경계했고, 고매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지향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전인全人 교육’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빠른 근대화가 무조건 우선 순위였던 우리나라에서 전인 교육도 사실상 말뿐이었다. 일송이 굳이 한림을 택한 것은 그 괴리를 메꾸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일송은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4년 공부하는 동안 인생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졸업하자’고 강조했다. 그는 교양 교육을 강조하며 교수들에게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슬기를 가르치자’고 부탁했다. 그의 교육관은 전통과 근대의 장점을 두루 통합한 전인全人과 전문專門의 조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년에는 그같은 통찰이 더 깊어졌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대로 접어들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 ‘제3의 물결’, ‘복지국가주의’ 등에서 예고되었듯, 종전과는 그 양상이 현저히 다른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사조로 그 문명의 방향을 전환해 나가야 한다. … 우리 인류의 앞날에 빛이 되어 갈 길을 밝혀 주고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학문뿐이다. 학문은 이제 한 차원 높은 새로운 탈바꿈으로 인류의 미래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제 구실을 다하여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다. (윤덕선, “총서 발간에 즈음하여”, 노태돈 외 지음, 『현대한국사학과 사관』, 일조각, 1991.)

 

일송의 도달점은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학문, 가치,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30년 전에 쓴 이 글은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금을 겨냥한 듯하다. 과거를 발판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하자는 그의 의지가 ‘한림’에 담겨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strong>이경구</strong><br>한림과학원 원장<br>한림과학원 HK교수<br>진단학회 연구이사<br>춘천학연구소 운영위원
이경구
한림과학원 원장
한림과학원 HK교수
진단학회 연구이사
춘천학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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