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뻗어 하늘에 닿을 수 있다면 학교법인일송학원의 역사는 1971년 한강변 모래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을 짓고, 지역사회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무료진료의 발길을 끊임없이 이어갔습니다. 대한민국이 수해 등의 재난으로 시름을 앓을 때마다 언제나 곁을 지키는 숨은 일꾼이자 이웃이었습니다. 설립자이신 일송(一松) 윤덕선 명예이사장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무료병원인 성심자선병원을 운영하고, 자체 재정으로 복지관을 운영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먼저 생각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이번에
학교법인일송학원의 사회공헌사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일송학원을 설립한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 선생은 참으로 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능력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 탁월한 능력의 인생을 사셨으며, 인간사랑의 정신으로 남을 도와주는 일에도 늘 앞장서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철학을 바탕으로 평생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종사하며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공헌 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1971년 서울 한강성심병원 설립 이후 지난 50년간 6개의 큰 의료 기관을 운영하면서 성심자선병원 운영,
일송(一松) 윤덕선 박사는 거목이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명석하면서도 유연했고, 물질적 이상의 가치관과 이타적 삶을, 다시 말해, 거인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명민하면서도 따뜻했고, 열정적이면서도 타애적이었고, 긴 안목과 통찰력은 범인의 한계를 넘어섰다.일제 식민지 시절인 1921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고, 평양고보(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입학 시에 기차를 처음으로 보고 탄 유일한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소년 입학생이었다. 평양고보 시절에 일송은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일송’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피식민지 나라의 국민
한평생 주춧돌의 삶을 추구한 일송 윤덕선 박사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 실천가였다. 동네 의원에서 출발해 대학병원과 대학까지 일궈낸 1세대 의사였던 윤덕선 박사는 국민 보건을 위한 신념으로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무료진료 활동을 꾸준히 펼쳤다. 그는 일생 동안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았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먼저 손을 내미는 숨은 거목이었다.기둥을 받치는 숨은 주춧돌학교법인일송학원의 설립자인 일송(一松) 윤덕선 박사는 1921년 1월 11일에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 우등리에서 태어났다. 윤
부친인 일송(一松) 윤덕선 박사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광복과 6·25전쟁 등 시대적으로 격랑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참된 인술을 펼치는 의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그리고 더 큰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윤덕선 박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었다. 나아가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인술을 펼쳤으며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의사이자 경영자로서 진심 어린 신념으로 우리가 마주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순수하고 소박했던 청년의 진로학교법인일송학원의 윤대원 이사장은 1945년
병원이 아주 귀하던 시절, 가장 어두운 곳에 손을 내미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에도 벅찬 빈곤한 나라였기에 국민들을 위한 보건의료는 딴 세상의 이야기일 때였습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변두리 지역에 병원을 지어 주춧돌이 되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습니다. 한강변 모래밭 위에 한강성심병원을 일군 의지와 신념은 바위보다 단단했습니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어깨 위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이들. 학교법인일송학원의 손길로 세상은 한층 더 밝아졌습니다. 갈라진 콘크리트 틈에서도 푸른 희망은 돋습니다.
1971년 12월 18일, 윤덕선 박사는 한강 이남에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인 한강성심병원(지금은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을 세웠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외된 변두리 지역에 주춧돌이 되자는 생각으로 한강변 모래벌판 위에 종합병원을 건립했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개원 초기부터 무료진료반을 구성해 순회무료진료를 적극적으로 다녔다.1972년 8월에는 영세민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하는 새마을의료 사업에도 뛰어들었으며, 새마을보건진료센터도 개설·운영해 봉천동 일대의 영세민을 무료로 진료해주었다. 한강성심병원은 보건의료 사각지대인
한강 이남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1971년 12월 18일, 토요일 오후 2시.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단상 앞에 모인 많은 사람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여의도와 영등포 사이를 흐르는 한강 샛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 위를 매섭게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상에는 몇 대의 석유난로가 뜨겁게 불꽃을 태우면서 추위와 맞서고 있었다.‘중앙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한강성심병원 개원식장’이란 문구가 아치 형태로 높다랗게 세워진 단상에서는 식순이 차례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은 바로 한강성심병원(지금은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이 정식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도 나서는 발길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수재민 복구 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 재건 운동에 착수했다. 이듬해부터 ‘근면, 자조, 협동’을 표어로 내건 새마을운동이 되었다.이후, 조국근대화1) 사업인 새마을운동은 보건 사업으로도 확장되었다. 보건사회부는 1971년 4월에 무의면(無醫面) 일소 대책을 내놓았다. 전국적으로 무의면이 630개에 달하는 열악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없는 농어촌 주민들의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보건지소를 신설하고, 구급차량을 보강해 순회진료를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민의
이타적인 정신1972년 3월 31일, 한강성심병원은 인턴·레지던트 수련병원 승인을 받아 진료, 교육, 연구를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실공히 종합병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일이었다.뒤따라 1972년 4월부터 보건사회부는 전문의 수련 규정에 따라 4년 차 레지던트를 무의(無醫) 지역에 6개월 동안 파견해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우리나라 의료 수급 체계가 너무나 빈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입된 제도였다.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갖기 위해 레지던트들은 무의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의사가 없거나 의료 시설이 없어서 의료
아무에게도 종이 아니면서 종이 되다의인(義人) 윤 박사는 “아무에게도 종이 아니면서 모든 환자, 불행한 사람의 종이 되며 봉사하겠노라.”라는 신조로서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 노력과 고생을 필설(筆舌)로 이루 다 옮길 수가 없습니다.김관철 前 국제라이온스협회 총재, 일송 윤덕선 박사 추모문집 『주춧돌』 중에서, 제49면한강성심병원은 개원 초창기인 1972년부터 영세민에 대한 의료 혜택과 지역사회 보건에 이바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영등포구 일대를 비롯해 한강 이남 지역에 순회무료진료를 다녔다. 월 1회이던 것을 나중에
남들이 관심 가지지 않는 곳에성심중앙유지재단은 1975년 1월 1일 ‘인간과학연구소’를 발족해 산하에 두기 시작했다. 1974년에 필동성심병원과의 관계가 정리되었는데, 그곳에 있던 의학문헌조사실과 공산권의학연구실을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전하면서 연구 사업과 복지 사업을 관장할 조직을 신설한 것이다.1973년 3월 1일에 개설된 의학문헌조사실은 국내에 발표되는 의학 논문을 색인 작업해 국제표준 방법으로 출판을 했다. 우리나라 의학도들의 연구에 보탬이 되려는 뜻이었다.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산화 작업으로 색인집
태평양 바다 건너에서1976년 12월 6일 오후 4시,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보이는 바다와 하늘이 모두 싱그러웠다. 그곳은 바로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괌이다. 태평양 마리아나제도에 있는 10여 개의 화산섬 중에서 중심이기도 하다. 일본 도쿄에 가야 미국령 괌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의 거리감이 멀게만 느껴지던 때였다.이날 괌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외교사절, 귀빈을 비롯해 3,000여 명이 운집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기립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Peace~”라고 말
건강한 생명을 위하여1975년 2월 5일, 필동성심병원에 있던 ‘임상영양연구센터’가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전했다. 임상영양연구센터는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식생활 개선과 그 합리화에 관한 과학적 자료를 제공하고, 식생활과 관련된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1972년 11월에 설립되었다.임상영양연구센터의 이전은 윤덕선 이사장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1968년 6월에 한국의과학연구소를 창립할 때부터 그는 한국인에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질병과 식품의 연관성 연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이때 임상영양연구부로 출